오대사 거란전 05 아보기(阿保機)가 이극용(李克用)과 후량(後梁) 협공에 합의하였으나 배맹(背盟)함 원문 국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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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사 거란전 05 아보기(阿保機)가 이극용(李克用)과 후량(後梁) 협공에 합의하였으나 배맹(背盟)함 원문 국역


아보기(阿保機)가 이극용(李克用)과 후량(後梁) 협공에 합의하였으나 배맹(背盟)함

국가

거란(契丹)

후량[梁] 주 001의 장수주 002가 당(唐)을 찬탈하자 진왕(晉王) 이극용(李克用) 주 003이 사람을 시켜 거란에 빙례[聘]를 행했는데 아보기(阿保機)가 병사 삼십만을 [이끌고] 운주(雲州) 주 004의 동성(東城)에서 극용과 회합했다. 주연을 베풀고 연회가 한창 무르익자 [극용의] 손을 잡고 맹약을 맺어 형제가 되었다. 극용이 [답례로] 금백(金帛)을 선물로 보낸 것이 상당히 후했고 함께 병사를 들어 후량을 공격하기로 기약했다. 아보기가 후진[晉]에 말 천 필을 남겨두었다. 이윽고 돌아와서는 맹약을 져버리고 조복[袍笏]을 입은 매로(梅老) 주 005를 사자로 보내 후량에 빙례[聘]를 행했다. 후량이 태부경(太府卿) 고경(高頃)과 군장(軍將) 낭공원(郎公遠) 등을 보내 빙례에 답했다.

해를 넘겨 [고]경(頃)이 돌아가려하자 아보기(阿保機)가 사자 해리(解里)를 보내 경(頃)을 따르게 하고 양마(良馬)·초구(貂裘)·조하금(朝霞錦)을 보내 후량에 빙례를 행하고, 표를 받들어 신하(臣下)를 칭하고 책봉[의 예를 내려줄 것][封冊]을 청했다. 후량이 다시 공원 및 사농경(司農卿) 혼특(渾特)을 보내 조서(詔書)로써 노고에 보답하게 하고 따로 기사(記事)주 006를 그에게 하사하고 함께 병사를 들어 후진[晉]을 멸할 것을 약속한 연후에 책봉의 예를 갖춰 [거란을] 생구(甥舅)의 나라로 삼고 또 자제(子弟)에게 삼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경사로 들어가 수비하게 하였다. 극용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한스러워했다.

이 해에 극용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화살 한 촉을 장종(莊宗) 주 007에게 맡기고 반드시 거란을 멸해 줄 것을 바랬다. 혼특 등이 거란에 도달했으나 아보기(阿保機)는 맹약과 같이 할 수 없다 하였고 후량 또한 일찍이 [그를] 책봉하지 않았다. 후량의 치세가 끝날 때까지 거란의 사자가 네 [차례] 도달했다.


梁將篡唐, 晉王李克用使人聘于契丹, 阿保機以兵三十萬會克用於雲州 東城. 置酒, 酒酣, 握手約爲兄弟. 克用贈以金帛甚厚, 期共舉兵擊梁. 阿保機遺晉馬千匹. 旣歸而背約, 遣使者袍笏梅老 주 001聘梁. 梁遣太府卿高頃·軍將郎公遠等報聘. 逾年, 頃還, 阿保機遣使者解里隨頃, 以良馬·貂裘·朝霞錦聘梁, 奉表稱臣, 以求封冊. 梁復遣公遠及司農卿渾特以詔書報勞, 別以記事賜之, 約共舉兵滅晉, 然後封冊爲甥舅之國, 又使以子弟三百騎入衛京師. 克用聞之, 大恨. 是歲克用病, 臨卒, 以一箭屬莊宗, 期必滅契丹. 渾特等至契丹, 阿保機不能如約, 梁亦未嘗封冊. 而終梁之世, 契丹使者四至.

교감주 001)

『五代史』(摛澡堂四庫全書 本, 浙江大學)에는 ‘梅老’가 ‘摩琳’으로 되어 있다.바로가기



각주 001)

後梁: 오대의 하나로 907년 朱溫이 稱帝하고 汴州(지금의 河南省 開封市)에서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梁이라 했다. 사서에서는 後梁이라고도 적는다. 923년 後唐에 멸망할 때까지 3대 17년간 계속되었다.  바로가기

각주 002)

後梁의 건국자 朱溫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로가기

각주 003)

李克用(856~908): 沙陀族 출신으로 이름은 國昌인데 李鴉兒라고도 부른다. 한쪽 눈을 실명하여 獨眼龍이라고도 불렀다. 그의 아버지 朱邪赤心은 당말 振武節度使였는데 당 조정이 黃巢의 亂을 진압하기 위해 사타족을 포함한 여러 종족 출신의 군대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관중으로 진입했다. 이후 여러 차례 戰功을 세우면서 河東節度使가 되었고 晉王에 봉해졌다. 후에 하동에 할거하면서 朱溫과 대치하였다. 開平 2년(908) 病死했는데 그의 아들 李存勖이 후량을 멸하고 後唐을 건립해 그에게 武皇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그의 묘호는 太祖이다. 바로가기

각주 004)

雲州: 당 貞觀 14년(640) 설치한 州의 이름으로 치소는 定唐縣(지금의 山西省 大同市)이다. 永淳 원년(682) 이래 운주와 雲中郡 등으로 몇 차례 이름이 바뀌었다.  바로가기

각주 005)

梅老: 거란 출신으로 일찍이 後梁 開平 원년(907) 阿保機의 명을 받아 후량에 갔고 天成 3년(927) 耶律德光의 명을 받아 後唐에 사신으로 갔다.  바로가기

각주 006)

원문의 記事는 황제의 起居를 기록한 書冊 정도로 이해할 수 있겠다.  바로가기

각주 007)

莊宗(885~926; 재위 923~926): 後唐의 개국황제로 이극용의 長子이며 이름은 存勖이다. 莊宗은 그의 廟號이다. 11세의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정벌에 나선 그를 당시 사람들은 亞子 혹은 亞次라고도 불렀다. 開平 2년(908) 克用이 죽자 晉王의 지위를 계승하고 同光 원년(923) 후량을 멸하고 稱帝했으며 국호는 唐이라 했다. 洛陽으로 천도하고 前蜀을 멸했다. 재위 후반 魏州에서 병란이 일어나 이극용의 양자인 李嗣源이 낙양을 공격한 가운데 郭從謙에게 살해당했다.  바로가기

색인어

이름

이극용(李克用), 아보기(阿保機), 극용, 극용, 극용, 아보기, 매로(梅老), 고경(高頃), 낭공원(郎公遠), [고]경(頃), 아보기(阿保機), 해리(解里), 경(頃), 공원, 혼특(渾特), 극용, 극용, 장종(莊宗), 혼특, 아보기(阿保機)

지명

후량[梁], 당(唐), 거란, 운주(雲州), 동성(東城), 후량, 후진[晉], 후량, 후량, 후량, 후량, 후진[晉], 거란, 경사, 거란, 거란, 후량, 후량,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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